안녕하세요?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습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올해 들어 책을 거의 일주일에 1권씩 읽었습니다.
대부분 종교서적이라 블로그에 공유하진 않았으나,
추후에 메뉴를 하나 만들어 공유할 예정입니다~
이번에 읽은 책음 파스칼의 팡세라는 책입니다.
참 쉽지가 않았네요
저자는 많은 분들이 다 아시는 파스칼입니다.
파스칼은 1623년 태어나 12세에 유클리드 제32명제를 푸는 것을 본 아버지가
수학과 기하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요
14세 때부터 당대 과학자들이 모임인 메르센 아카데미에 출입할 정도로 천재였습니다.
39세의 나이로 일찍 죽었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엄청납니다.
1640 원추곡선론 발표
1642 계산기 제작
1646 23세에 기독교로 회심
1647 진공에 관한 새 실험
1648 액체평형에 관한 대실험담
1653 액체평형론, 대기압력론
1654 수삼각론
1655 그리스도의 생애약전, 기하학적 정신
1656 한 지방인에게 보내는 편지
1659 병의 선용을 위한 기도
1660 귀족 신분에 관한 세 논문
1662 파스칼이 고안한 승합마차 파리에 운행
1662 39세로 생을 마침
팡세라는 책을 읽고 정리하는 차원에서 글을 남깁니다.
1.
우리의 모든 이성적 사고는 결국 감정에 굴복하는 것으로 귀착된다.
그런데 환상은 감정과 유사하면서도 반대되는 것이어서 사람들은 상반되는 이 둘을 구별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자기 감정을 환상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은 자기의 환상을 감정이라고
말한다.
하나의 기준이 있어야만 한다.
이성이 기준으로 자처하지만 이성은 어느 방향으로나 휘어진다.
2.
사람을 유익하게 꾸짖고 그의 잘못을 깨우쳐주려고 할 때는 그가 어떤 방향에서 사물을 보는가를
관찰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 방향에서 보면 대체로 옳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에게 옳은 점은 인정하되 그것이 어떤 면에서 틀렸는가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는 이에 만족을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틀린 것이 아니라 단지 모든 면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는 것에는 화내지 않지만 틀렸다는 말은 듣기 싫어한다.
아마도 그 이유는 본래 사람은 모든 것을 볼 수 없고 또 그가 사물을 바라보는 그 방향에서는
본래 틀리는 법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감각이 인지하는 것들은 항상 진실된 것이므로.
3.
인간에게 자신의 상태만큼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영원만큼 두려운 것도 없다.
그러므로 자신의 존재의 파멸과 영원한 불행의 위험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이 있다면 이것은
결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다른 모든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딴판이 된다.
극히 사소한 일에 이르기까지 두려워하고 미리 챙기고 느낀다.
그런데 일자리를 잃었거나 명예를 훼손당한 듯한 느낌 때문에 몇 날 몇 밤을 분노와 절망 속에서
보내는 바로 그 사람이 죽음에 의해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불안도 동요도
느끼지 않는 것이다.
4.
그러나 영원은 존재한다. 그리고 이 영원의 문을 여는 죽음.
5.
신앙은 증거와 다르다.
증거는 인간적인 것이고 신앙은 신의 선물이다.
신이 인간의 마음속에 넣어주는 것은 믿음이고 증거는 흔히 수단이다.
그러나 믿음은 마음속에 있으며 scio(나는 안다)가 아니라 credo(나는 믿는다)라고 말하게 한다.
6.
사람들은 종교를 멸시한다.
그들은 종교를 혐호하고 그것이 진실된 것일까 두려워한다.
이것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먼저 종교가 이성에 어긋나지 않음을 밝히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존경할 만한 것이므로 마땅히 존경심을 갖게 한다.
다음으로 종교가 사랑할 만한 것임을 보여주고 선한 사람들에게 그것이 진실된 것이기를
소망하게 한다.
그런 후에 종교가 사실상 진실된 것임을 보여준다.
종교는 존경할 만하다, 인간을 올바르게 이해하였으므르
종교는 사랑할 만하다, 참된 행복을 약속하므로
7.
사람은 너무 젊으면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하고 너무 늙어도 마찬가지이다.
충분히 생각하지 않거나 지나치게 생각하면 고집을 피우고 또 열중한다.
그림을 너무 멀리서 또는 너무 가까이서 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적절한 자리는 오직 불가분의 한 점이 있을 뿐이다.
그 외의 점은 너무 멀거나 가깝거나 높거나 낮다.
그림에 있어서는 원금법이 이 점을 결정해 준다.
그러나 진리와 도덕에 있어서는 누가 그것을 정해 주는가?
8.
출세의 길을 여는 행운의 각 단계마다 우리를 진실에서 더욱더 멀어지게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사랑을 받으면 유리해지고 반감을 사며 불리해지는 그런 인물들의
비위를 거슬리는 것을 더욱더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어떤 왕이 전 유럽의 웃음거리가 되고도 자기만은 이것을 모를 수도 있다.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는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듣는 사람에게는 유리하지만 말하는 사람에게는 해롭다, 미움을 사기 때문에
9.
인간의 삶은 영원한 환각일 뿐이다.
서로를 속이고 피차 아첨하기만 한다.
우리에 대해 우리의 면전에서 마치 우리가 없을 때처럼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간 사이의 결합이란 오직 이 상호 기만 위에 서 있을 뿐이다.
만약 자기가 없는 자리에서 친구가 자기에 대해ㅏ 말하는 것을 알게 된다면 설사 그것이
그가 진실되게 사사로운 감정없이 말하였다 해도 존속할 우정은 거의 없을 것이다.
10.
비참. 솔로몬과 욥은 인간의 비참을 가장 잘 알았고 가장 잘 표현하였다.
전자는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서, 후자는 가장 비참한 사람으로서,
전자는 경험을 통해 쾌락의 헛됨을 알았고, 후자는 불행의 실체를 알았다.
11.
사람은 의식이 없으면 불행하지 않다.
무너진 집은 비참하지 않다.
비참한 것은 인간 뿐이다.
12.
악은 행하기 쉽고, 악은 무수히 있다.
선은 거의 하나뿐이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악은 선이라고 불리는 것 만큼이나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이 특성 때문에 종종 이 특수한 악은 선으로 간주된다.
이 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선과 마찬가지로 정신의 비상한 위대함까지도 필요하다.
13.
사유. 우리의 상태가 진정 행복하다면 행복해지기 위해 굳이 이것을 생각하는 것에서
마음을 돌릴 필요가 없을 것이다.
14.
정의에 복종하는 것을 힘으로 강요할 수 없었으므로 힘에 복종하는 것을 정의로운 것이 되게 하였다.
정의를 힘있는 것으로 만들 수 없었으므로 힘을 정의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정의와 힘이 결합하여 평화를 이루게 하였다.
이 평화야말고 최고선이다.
15.
지혜는 우리를 어린 아이로 돌아가게 한다.
인간의 지식은 서로 맞닿는 두 극단을 가지고 있다.
첫번째 극단은 모든 사람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자리 잡은 본래의 순전한 무지이다.
또 하나의 극단은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들이 도달하는 무지이다.
그들은 인간이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편력한 다음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출발했을 때와 같은 무지 속에서 자신을 만난다.
그러나 이것은 현명한 무지이다.
그 중간에 본래의 무지에서 벗어났지만 또 하나의 무지에 이르지 못한 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이 충족한 지식을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으면서 모든 것에 통달한 체 한다.
이자들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모든 것을 그릇되게 판단한다.
16.
정의, 힘
정의에 복종하는 것은 옳고 더 강한 것에 복종하는 것은 필연이다.
힘없는 정의는 무력하고 정의없는 힘은 폭력이다.
힘없는 정의는 반대에 부딪힌다, 왜냐하면 사악한 자들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힘없는 정의는 규탄 받는다.
그러므로 정의와 힘이 함께 있어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정의가 강해지거나 강한 것이 정의로워야 한다.
[출처 : 민음사 '팡세']
조금 읽었는데 내용과 분량이 너무나도 상당해서 정리는 여기까지만 하고
나머지는 나중에 해야하겠습니다.
파스칼은 대단한 천재였습니다.
팡세라는 책을 읽어나가는데 뭔가 수필이나 소설처럼 또는 사설처럼 순서에 맞게 기술한 것이 아니고
사색의 단편을 모은 내용들의 연속이라서 연결이 잘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전체적인 서사는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제가 짧은 지식으로 파악하기로는
인간은 결국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시작해서 대단한 지식과 이성을 갖추게 되면
결국 인간의 한계를 다시 깨닫고 무지를 인정한다는 내용입니다.
무지에서 다시 무지로 가는거지요.
두번째 무지를 현명한 무지라고 하네요.
인간의 이성의 한계를 여러가지 관점과 사례를 들어
얘기하고 있는데 어느 부분은 금방 와닿고 어느 부분은 한참을 고민해도
무슨 의미인지 뚜렷하지 않아서 건너띄기를 하면서 읽었습니다.
전반부는 이성의 한계에 대해
후반부는 그렇기에 신이 존재하고 올바른 신은 결국 기독교에서 얘기하는 예수그리스도이다라는
결론을 도출합니다.
수학자라서 그런가 확률로도 해석을 해주는데요
인간에게 죽음은 100%의 확률이라는 관점에서 나온 얘기입니다.
1. 100% 확률로 인간은 죽음
2. 그런데 죽음에 대해 또 죽음 이후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은 없음
오히려 작은 것들 명예, 재산, 자존심 상한 일들 때문에 잠을 설침
3. 죽음 이후는 영원이란 시간이 있음 / 죽고 나면 영원히 죽는 것임
그래서 나온 파스칼의 신의 존재와 죽음 이후에 대한 확률이 있는데요
그것을 기대값으로 표현했습니다.
확률 x 발생할 경우의 값 = 기대값
50%의 확률로 100원을 딸 수 있다면 기대값은 50원입니다. (50% x 100원)
20%의 확률로 1000원을 딸 수 있다면 기대값은 200원이죠 (20% x 1000원)
이런 식으로 기대값을 풀었는데요~
<신이 존재하지 않을 때>
1. 신이 없는데 신이 있다고 믿을 때 : 기대값 = 0
신이 없으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믿는데는 큰 힘이 들지 않으므로
2. 신이 없는데 신이 없다고 믿을 때 : 기대값 = 0
신이 없으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믿지 않았으므로
<신이 존재할 때>
3. 신이 있는데 신이 있다고 믿을 때 : 기대값 = + 양의 무한대
신이 있으므로 죽음 이후 영생(영원한 삶, 천국) 또는 영벌(영원한 벌, 지옥)이 있고
믿었기 때문에 영원한 양의 기대값(천국)을 가지게 되므로
4. 신이 있는데 신이 없다고 믿을 때 : 기대값 = - 음의 무한대
신이 있으므로 죽음 이후 영생, 영벌이 있고 안 믿었기 때문에 영원한 음의 기대값(지옥)을 가지게 되므로
먼저 파스칼은 신을 믿는 것이 자애롭고 아주 이성적인 판단이라고 말하는데요
Self-love, Selfish의 의미인데 내가 믿지 않았는데 신이 있다면 엄청난 손해를 떠나
영원한 벌을 받게 되므로 그것이 두려운 것이고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비이성적인 판단이라는 것입니다.
즉, 신이 있다고 믿는 것이 나를 위한 일이고 이성적이라는 건데요.
신을 믿게 되면 신이 없어도 기대값은 '0'이고, 신이 있다면 영원한 양의 기대값(천국)을 가지므로
믿는 것이 확률적으로 옳다는 것이네요.
신을 믿지 않을 때 신이 존재한다면 기대값이 영원한 음의 기대값(지옥)이므로
이것을 선택하는 것은 자애(Slef love)롭지 않으며 비이성적인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럼 종교 중에서 신을 믿는 것까지 논증을 하고나서 왜 그럼 크리스천인가?에 대해서
생각을 풀어나갑니다.
여기는 너무 종교적인 색깔이 강해서 넘어가겠습니다.
파스칼에 대해서 잘 몰랐는데 참 재미있네요
팡세라는 책은 어려웠는데
그래도 종교적인 내용과 이성에 대한 철학을 배울 수 있고
사람의 심리와 모습을 재미있게 비유한 점은 지금도
여전히 교훈적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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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 읽어주시느라 고생하셨고 감사합니다.
요즘 재테크도 재미있는데 이런 부분도 참 재미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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